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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02:4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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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 이희중
네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토요일 오후 가장 화려한 옷을 차려 입고
거리로 나서지 네가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아무에게나 함부로 사랑을 고백하고
그와 음란한 춤을 춘 후
무서운 밤을 함께 지내지 아침이 오면
혹시 바로 오늘 네가 태어날지도 몰라 잠시
걱정하며 피가 나도록 오래 이빨을 닦지만
네가 말을 배울 때까지 나를 알아보고
부를 때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았으므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침을 뱉고
입을 큰소리로 헹구지
온갖 산과에 수소문을 해볼까 생각도 하지만
나는 네 이름조차 알지 못하므로 혼자
간단히 아침을 먹고 쓸데없이 전화를 돌려
이미 태어나버린 불쌍한 친구들과 농담을 하지
저녁이 오면 그들과 술을 먹고
살아가는 일이 한없이 즐겁다고
거짓말을 해대지 취해서는 네가 나없이 살다가
이미 죽었으면 어떡하나 고민하며
술병을 깨기도 하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나
너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고
나는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려 온 걸
무엇보다도 네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지 너무 자유로워서
혼자일 때는 큰 소리로 웃다가 드디어 울지
내 기다림이 아무 의미도 없으므로
너는 영영 태어나지 않고
내가 자유롭게 죽어가기를 기다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