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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22: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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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로 시작해서 규범으로 끝나는 게 흥미롭네요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 전반을 전체성을 극복하는 데 쏟아부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규범이라는 것은 모든 개인들(레비나스적 용어로는 무한한 절대적인 타자들)에게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저는 그 규범이 레비나스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전체성의 성격을 짙게 띈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레비나스가 얘기하는 타자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위를 제약하고 가치 판단을 내리는 규범적 윤리라기보다는 존재자가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타자로 이행하는, 그럼으로써 존재의 유한함을 초월하는 것 아닌가요?
제가 레비나스에 대해서는 옛날에 강의 하나 들은 것밖에 없어서 지금 링크에 걸어주신 자료도 좀 읽어보고 옛날에 강의 들을 때 받았던 자료도 다시 대강 훑어봤을 뿐, 레비나스 본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기 때문에 좀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알기로는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존재라는 것은, '존재자 없는 존재'에서부터 시작하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레비나스는, 마치 불면증 환자가 주체적으로 잠을 잘 수 없고, '잠'이라는 어떤 것이 와서 자신을 지배해주기를 바라면서 '그저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은 본디 '그저 있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저 있음'의 상태에서 '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주체를 각성하고 '존재자'의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존재자 없는 존재는 근원적인 폭력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유는 실현될 수 없고, 어찌 되었든 이 세상에 존재해버린 나의 존재는 무한히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존재자 없는 존재가,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통해서 '존재자'로서 각성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존재의 고통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존재자(주체)는 존재의 고통을 받는다고 해요.
때문에 존재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존재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계와 관계를 맺는데, 그 관계 맺음의 방식을 레비나스는 향유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물건을 향유함으로써 우리는 존재의 고통에 위안을 주려고 한다는 겁니다. 아마 링크된 글에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의 가능성으로 레비나스를 설명하는 것이 이러한 향유 개념을 레비나스가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
레비나스는 향유라는 방식으로 결코 존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은 자기 보존 충동이 아니라 자기를 초탈하여 타자로 나아가려는 충동이기 때문-즉, 물건을 향유하는 것만으로는 자기를 초월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둘째, 향유의 본질은 결국 동일자 속으로의 타자의 변형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부분에서 작성자님이 논거를 얻으시는 것 같은데 그게 논거과 되는 과정이 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왜냐하면, 첫 문단에 썼듯이 이러한 문제에서 레비나스가 결국 비판하려고 하는 것은 '전체성'이거든요. 즉, 나의 잣대나 나의 평가에 타자를 귀속시킴으로써 타자의 자기화하는 것, 이것이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인데요. 글을 삭제하면 안 된다. 라는 객관적인 규범이 만들어졌을 때, 그러한 규범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질문을 세네 번 쯤 하는 것 같아서 좀 죄송한데, 어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서 글을 삭제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누군가는, 레비나스가 얘기하는 '비대칭적인 약자로서의 타자'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레비나스가 얘기하는 얼굴의 현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비대칭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동등한 관계라면 상호적인 사회계약이라고 하는 근대적인 기존의 가치관으로 환원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작성자님은 쭉, '게시물을 쓴 사람'과 그 게시물에 '댓글을 쓴 사람'의 관계를 비대칭적인 것으로 보고, 댓글을 쓴 사람을 호소하는 타자로 보고계신 것 같은데, 저는 그 반대 상황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즉, 어떤 게시물을 쓴 사람과 그 게시물에 댓글을 쓴 사람이 직접 둘이 만나서 '얼굴의 현현'을 서로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근데 게시물을 쓴 사람이 '게시물을 지워야만 하는 부득이한 상황'에 처해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다면, 상대적으로 호소를 하게 되는 사람은 게시물 작성자 쪽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 호소에 대한 응답의 책임이 댓글 작성자에게 있게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이처럼 관계가 역전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고, 댓글 쓴 사람들을 비대칭성의 약자(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한데)로 인식하는 '규범'을 만들고, 그 규범에 의해서 게시물 작성자들에게 어떤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역시 레비나스가 비판하던 전체성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