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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19: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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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력자?"
온 몸이 꿀로 덮힌 채 제이드는 피식 웃었다. 퀸비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루나펠이 깔깔 웃으며 다가왔다.
"이능력자~? 난 그런건 잘 모르겠네. 그런데 우리 제이드 아저씨는 어디로 가는 길이였을까?"
루나펠의 뒤에서 노란 옷을 입은, 광대처럼 생긴 거인들이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벌들을 데리고 다니는군?"
"어머. 일벌이라니, 말 조심해. 내 충실한 친구들이야. 너희들도 인사해야지?"
루나펠이 뒤를 돌아보며 일벌들을 향해 말하자 우습게도 그들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궁중마법사 필립 제이드는 동양에서 온 해시계를 가지고 수도에서부터 어머니의 숲 까지 숨가쁘게 달려가는 중이였다.
이계 왕이 군대를 이끌고 왕국의 모든 생명들을 사멸시키며 전진하자 세계멸망이라는 공포가 드리웠고 모든것을
되돌릴 해시계를 동양의 학자로부터 극비리에 가져온 것이였다. 처음에는 전설이라는 말 뿐이였지만 마왕이 이계에서
쳐들어 온 마당에 전설도 역시 실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다 봤어. 근데 난 바다가 무서웠거든. 유람선에 판옥선 수십대가 붙었지 아마? 하늘엔 까치를 탄 병사들이
널 지켜주고, 세상에! 거북선도 뒤따라왔단 말이야? 나 분명히 거기 가면 죽었을 걸? 맞지?"
"...조선 병사들이 널 봤으면 그냥 두지 않았을거다. 이 마왕의 첩년아!"
순간 그녀가 빠르게 제이드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이였다. 벌처럼 빨랐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는 그녀의 예쁜 얼굴에는
독이 잔뜩 묻어있었다. 붉은 트윈테일 머리와 푸른 눈이 아주 매력적이였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마녀였다.
"난 그 아저씨 별로 안좋아하거든? 말 조심했으면 좋겠는데... 혹시 모르지? 해시계가 어디에, 누구한테 전해지려고
했는 지 순순히 알려주면 아저씨 애인으로는 괜찮을 것 같.은.데?"
- 콰앙!
별안간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본 제이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루나펠은 샐쭉한 표정으로 그 곳을 바라보았다.
"아...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인데...칫."
"경거망동하여 일을 그르치려 하는구나! 계집년아! 네 기행도 여기서 끝이다!"
"박! 여길 어떻게!"
조선의 학자, 의금부의 집행관, 왕의 밀사. 박현은 수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이드의 호위무사이자
그와 똑같은 마법사였다. 조선에서는 그를 부적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박현이 중력부적으로 일벌 하나를 압사시킨 것이다. 루나펠이 외쳤다.
"잡아!"
남은 일벌 네 마리가 공중부적의 힘으로 떠 있는 박현을 향해 뛰어올랐다.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하늘로 뛰어오르자
네 겹의 날개가 생겨나 그 육중한 몸을 공중으로 튀어올리도록 만들었다. 박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붉은 색 실로 글자가 새겨진 한지 부적 네 장을 한꺼번에 펼쳐 그들을 향해 하나씩 던지며 외쳤다.
"살!"
네 개의 부적에서 족제비 형상의 환영이 나와 일벌들을 하나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들이 비명을 지르며 족제비 환영과 함께
어둠균열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일벌 하나가 박현을 향해 다시 돌진해오고 있었다.
"박! 하나 남았다!"
- 슈욱!
박현이 방호부적을 들어 공격을 막아내려고 했으나 너무 늦었다고 느낀 순간, 애기살이 날아와 일벌을 그대로 관통했다.
화살이 날아온 쪽에는 박현의 여동생 박한설이 있었다.
"잘 해 주었구나 동생아!"
고귀한 가문의 자제이자 당대의 문장가로 청나라와 왜, 그리고 이 대륙까지도 그 명성이 알려진 박한설은 빼어난 외모로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여는 것을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편전을 내리며 불타 사라져가는 일벌을 보던 박한설이 박현을 향해 외쳤다.
"나가 시방 한양말 쓰지 말라고 안혔소! 뭣땀시 그렇게 한양말에 집착하는겨! 지금 시방 우리 가문을 부정하는거여 뭐여! 공공장소에서
뒤져불고 싶은겨? 화살 두 발 남았는데 입이랑 거시기에 한방씩 쏴 주면 정신차릴겨?!"
공중부적을 소멸시키고 지상으로 내려온 박현이 동생의 일갈에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루나펠을 향해 다가갔다.
오빠의 손이 자신의 머리에 닿았다는 생각에 박한설이 질색을 하며 머리를 털어냈다.
"어머. 오빠랑 동생이 사이가 좋네? 안녕?"
루나펠은 뒷걸음질 치며 박현과 박한설, 제이드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저 씨불년이... 누가 사이가..."
그렇게 말하며 편전에 애기살을 끼워 당기려다, 꿀로 뒤범벅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제이드를 본 그녀가 사색이 되었다.
"아따 내가 왜그랬을까! 아니요! 제이드 아저씨. 저는요? 아저씨가. 여기에 계신 줄 몰랐.어요. 어머나. 나도 차암!"
잘 생긴 제이드의 외모는 조선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박한설도 예외는 아니였다. 박한설은 남몰래 제이드를 흠모했지만
조선을 떠나며 다시 볼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현은
부적 두 장을 들어 푸른색 불꽃으로 태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할 일이 생각난 박한설도 다시 편전에 애기살을 끼웠다.
"말해라. 여기서 죽을건지, 아니면 마왕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거라. 나머지 부하들은 어디있는가? 해시계가 무슨 용도인지를 아는가?"
제이드와 박현, 박설의 시선이 모두 루나펠을 향했다. 부적의 푸른색 불꽃이 팔과 함께 통째로 타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고 있는 모양새긴 하지만 루나펠은 당황하지 않았다.
"으음~ 루나펠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다음에 알려주면 안될까? 그리고 나 아직 죽기 싫은데? 해시계는 어디서 찾을 지
그것만 생각해야겠네? 그럼 여러분들 다음에 봐요?"
어둠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나타난 일벌 하나가 루나펠을 낚아채 하늘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저 저 씨불년이 저거 저!"
박현의 푸른색 불꽃이 사그라들었지만 박한설은 아닌 것 같았다. 하늘을 향해 편전을 신경질적으로 당겼다.
박현이 그녀의 팔을 가만히 내렸다.
"그만해라 동생아. 지금 저 계집을 죽여도 얻을 것이 없다."
오빠에게 항상 막 대하는 듯 하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박한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씩씩거리긴 했지만 지금은
오빠의 말을 듣는 것이 맞다는 듯 조준하기를 멈췄다. 그들은 루나펠이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본 뒤에야 제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꿀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제이드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던 박한설이 그만 참지 못하고 꿀을 한 점 찍어 입으로 넣었다.
"오메 지리산 토종꿀 아녀 이거? 겁나게 맛있구마잉."
그 재미난 모습을 보던 제이드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박. 꿀은 벌의 타액이랍니다. 침이에요 침."
"갸-악! 퉤!"
얼굴표정이 일그러진 박한설이 침을 뱉으며 꿀에서 슬금슬금 멀어져갔다.
박현이 크게 웃으며 소멸부적으로 제이드를 원래 상태로 풀어주었다. 달이 너무 밝았다.
어머니의 나무로 향하는 길 위에서 세사람은 다시 이동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