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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1 20:22:31
2
새벽.
민철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청명한 호수 먼 곳에서부터 멀리멀리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남자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지난 날을 생각했다.
민철은 상처입었다. 검은 정장 안으로 여기저기 찢어져 울컥울컥 피를 내 뿜는데도,
희번뜩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많은 사람들을 향해 호기롭게 칼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누군가 두려움 섞인 비명을 지르며 마침내 달려온다! 공포에 질려 달려오는 그 눈은 사람을 찌를 눈이 아니였다.
민철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기가 막혔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놈이.
"느들 와 내가 연즉 도망 안가고 이래 삐대는지 아는놈 있으모 손 들어봐라."
"개소리 집어쳐! 이 씨발새끼야!"
달려오던 그 남자는 민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마침내 칼을 번쩍 들었다.
"끼야아아!"
순간 민철은 고개를 숙여 달려오던 남자를 향해 칼을 번쩍 들었다. 장검. 흔히들 말하는 '사시미' 라고 불리는 칼 과는 다른
베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칼이다. 1975년 사보이 호텔 사건 때 조창조와 오종철을 끌어들인 조양은이 사용했던 그 칼과 완전히 똑같은
칼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쳤고 감옥신세를 졌지만, 민철은 달랐다.
민철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위로 해 자신에게 사시미를 내리찍으려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찰나의 순간, 두려움에 질린 남자가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고 그 때를 놓치지 않은 민철은 자연스럽게 칼을 위로 휘둘렀다!
- 써억!
베기 위한 용도의 장검이지만 민철은 그것을 자르는 용도로 썼다. 칼 끝에 묵직한 감촉이 느껴지고 곧이어 뼈를 향해 칼날이 닿는 느낌이 들자
칼을 비스듬하게 올려 깎아지르듯이 힘껏 내리쳤다. 완전히 잘렸다! 팔은 포물선을 그리며 잘려나갔고 곧이어 상황이
파악된 남자는 멀어지는 팔을 보며 괴물처럼 울부짖었다.
민철은 바닥에 발이 닿자 마자 다시 한 번 힘껏 뛰어 칼 손잡이 끝 뭉툭한 부분으로 남자의 정수리를 힘껏 찍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얇은 몸이 마치 철판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팔이 잘린 남자는 기절해 당분간 깨어나지 못 할 것이다.
- 타악.
사뿐하게 바닥으로 착지한 민철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입아프게 하지마라. 내가 와 여서 삐대고 있는지 아는 사람 있으모 손 들어봐라라고 내 말 안하드나?
임마처럼, 요고 임마처럼"
기절한 남자를 툭툭 차며 민철이 말을 이었다.
"요 봐라. 임마처럼 손에 칼같은거 들고 대답할라 하모 팔짤리는기고, 성실하게 대답한 놈은 내 최대한 고통없이 보내주께."
검은 양복을 입은 무리는 술렁거렸다. 그 두려움 속에서 '저요!' 하고 누가 이야기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그 광경에 민철이 껄껄껄 거리며 웃어댔다.
마침내 그들이 모두 민철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서슬퍼런 기억에서 돌아온 민철은 잠시 눈을 떴다.
멀고 먼 호숫가 안개 아지랑이가 송화가루 냄새를 머금은 채 일렁거리고 있었다.
민철의 아버지는 소금쟁이였다. 끝끝내 소금장이로 불리지 못했던 소금쟁이.
어렸을 적 민철은 먼 발치에서 아버지가 소금 밀어내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송화가루 날릴 적이면 '소금 뜰 때가 되었다' 라며 그 말라비틀어진 손으로 소금을 밀어내던 아버지는 민철이 벌어오는
민철이 벌어오는 부도덕한 돈을 받지 않았다.
"민철아. 임마야. 소금맨키로 짠 것이 사람 피라. 내는 여즉 소금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맞춰주고 살았는데
니는 어째 다른 사람에서 소금 짜는 것을 허고 있노. 그라고 다른 사람 몸에서 소금 짜낸 돈으로 니가 간맞춰가매
산들 그것이 어째 간맞는 삶이겠나 이말이다. 여러 말 하지말래이. 인자 다른 사람 몸에서 소금 고마 짜내리."
민철은 아버지의 말에 깊이 고개 숙여 단 보자기에 싼 만원짜리 다발을 내려놓고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소금. 그 소금. 땀을 바가지로 흘릴 때마다 염전에서 한움큼 집어 입에 털어놓고
자식이 가져다 주는 돈은 한푼도 쓰지 않았던 그 아버지는 마침내 염전에 뼈를 묻을 것이라는 말과 같이 염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민철... 음... 아니죠. 기술자님? 이제 더 이상 의원님께서 당신을 봐줄 수 없다고 하시는데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근데 기술자님 덕분에 이번에 의원님께서 4선에 성공하셨으니, 좋습니다. 서울지검 강검사 아실텐데요. 저희쪽 사람이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십 년만 쉬다 나오세요. 아버지가 염전을 하셨다고 하니까... 십 년만 지나면 그토록 원하던 아버지 고향에
돌아가실 수 있겠네요. 축하합니다. 그럼."
4선에 성공한 김종석 의원의 보좌관은 그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 통장과 도장을 내밀며 가볍게 웃었다.
민철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돈을 받아들였다.
정치인, 재계인사, 스포츠맨, 연예인, 그들의 성공가도에서 민철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처럼 남의 몸에서 소금을 짜 내던 민철과 그들의 결말은 언제고 같았다. 그는 이용될 만큼 이용되고
돈 몇푼에 숨어 살다 도망다니는 신세처럼 살았다. 민철은 한 때에 그것을 풍류와 방랑이라는 좋은 말로 포장하며 살았다.
싸움은, 칼질은, 염전짠내와 그렇게 느끼한 송화가루 냄새가 싫어 뛰쳐나온 그에게 다가온 아주 달콤한 유혹이였다.
오갈 데 없는 청소년에게 사람 하나 찔러주고 받는 수많은 지폐다발은 아주 매력적인 일거리였다.
단 한번도, 아버지처럼 그렇게 염전에서 소금이나 밀며 비참하게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세상은 냉정하고 잔인했다. 민철은 항상 그랬다. 물러설 곳이 없을 것처럼 싸웠다. 사람들은 그에게 해결사 라던지 기술자 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띄워줬지만 그들의 성공가도를 닦아주는 노동자에 불과했다. 어쩌면 백정에 불과했다.
문득, 송화가루 날리던 새벽에 아버지가 염전으로 나가며, 선반위에 올려줬던 사과를 떠올렸다.
그것은 민철은, 나는, 아니, 그 짠내와, 아버지. 아빠.
"인자 왔어요. 아버지. 내 인자 돌아갑니더."
민철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조금 쓴 웃음을 지었다.
낚싯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민철은 당기지 않았다. 물 속 깊숙히 찌가 들어갔다가 한참을 움직이더니 결국은 낚싯대와 함께
호수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민철은 잡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일어나 주머니에 있던 통장을 호수를 향해 집어던졌다.
소금, 소금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를 위한 소금이 아닌 남을 위한 소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