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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9: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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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아니, 그린테일 씨. 몸은 좀 어떠신가요?"
에이미가 침대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치의 요한이 밝은 표정으로
간호사와 함께 들어와 인사를 건넸다. 지난 몇 년간 밝은 녹색이였던 그녀의 눈은 어느새 검은 녹색에 가까운,
생기없는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녹색 머리칼 역시 하얗게 새어가고 있었다. 에이미가 조용하게 인사를 받았다.
"괜찮아요. 어제 약을 좀 먹었더니... 오늘은 그렇게 나쁘진 않네요."
"윈스턴 총리께서 왔다 가셨습니다. 몇 시간 넘게 있다 가셨는데 한 번쯤 만나주시는 것도..."
그녀가 사는 대 저택의 1층 접견실에 한 사내가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담배만 피우다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뭇 사람들이 듣기에 귀족들의 여유로운 삶, 그런 삶의 한 장면으로 치부되는 일이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지금 이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일은 여유로운 삶이 아니라 폐위된 여왕의 박복한 삶이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이 아주 좋아요. 오늘은 밖에 나갈 수 있을까요?"
에이미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주는 휠체어를 가리켰다. 주치의 요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간호사를 바라보자, 간호사 역시 그 시선을 받지 않은 척 차트를 내려다봤다.
"그건... 미안하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윈스턴 총리께서도 그린테일 씨가 밖에 나가는 것 보다...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편이 더 좋을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말 상대가 필요하신 거라면..."
"하지만 윈스턴은 아니에요. 그는 내가 아는 그 예전의 윈스턴이 아니에요."
"그린테일 씨..."
"에이미라고 불러주세요. 아니, 에이미도 싫어요. 수 라고 불러주세요. 에이미는 내가 혁명군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날 부르기 쉽게 만들어 준 이름이니까요. 내 진짜 이름은 수 에요. 탈라 수. 아마 내가 계속 그 붉은 협곡에
살았더라면 가졌을 그 이름."
"..."
요한은 단지 헛기침을 하며 '하지만 그 이름은 이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원주민의 언어...'
까지 이야기하다 순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에이미의 눈동자에 당황하며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혁명이 성공했다고 보시나요?"
에이미는 붉은나무 협곡에 사는 푸른늑대 부족의 예언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레인 레너드 국왕, 당시 레인 레너드 중령의 사랑으로 영원히 그의
옆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래서 레인을 따라 나섰다. 예언대로 새 나라가 세워졌고 신을 죽인 레인은 낡은 정부의 수장을
폐하고 새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약속대로 인민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새 국왕이 즉위하기 전 까지는.
"최소한 낡은 정부를 몰아내고...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 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육십년이나 지났죠. 신을 죽이고, 이제 우리는 신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우리의 삶을 온전히... 영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이 실버레인 왕국의 자랑스러운..."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군요. 저도 많이 봤어요. 칼튼제국 시절부터 그렇게 인민들을 세뇌하곤 했죠. 이제는 새 국왕이 그렇게 하는군요."
"하지만 그건 사실..."
"거짓은 그 자체로 용서받지 못해요. 레인 국왕이 하지 못했던 수많은 혁명의 단계를, 새 국왕은 이행하지 않고 있어요.
나는 스스로 여왕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들이 총칼을 들고 왔기 때문이 아니에요. 레인 국왕의 아내가 아닌 이상 나는 국모로
있을 이유가 없었어요. 그뿐이죠. 그런데 이제는 내가 선대 왕이 했던 대중 혁명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며 탄압하는군요. 실버레인 왕국은
이제 그 이름을 이야기할 가치도 없어요. 어쩌면 예견된 일이죠."
"...그린테일씨. 아니 에이미 양... 혁명의 주체로써 당신이 이 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전 인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인 국왕과 달리 새 국왕은 당신이 행했던 혁명을 덮어두고서라도 이 저택에 당신을 감금하고 말았습니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혁명의 주체는 더이상 혁명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 위험하게 발언하시면
저 역시 에이미 양이 온전히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의사이기 이전에 군인입니다.
...하지만 미안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화이트래빗 엘프는 여전히 로서노아 국경에 마주한 그랜드마더 산맥에 숨어 살아요. 루샨카, 비비앙, 파빌리온... 단지 도시에 발을 들이기 싫다는
이유로 나라를 세운 공을 마다한 채 그들은 그렇게 살아요. 그리고 돌산등성이 코볼트는 말뿐인 차별철폐 정책에 도시로 진출했지만 아직도 하급 노동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수도의 트윈브릿지 아래 더러운 강에 집을 짓고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그들을 위해 정책을 보완해달라고 총리께 부탁드린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요? 새 국왕이 귀를 닫고 더러운 연회를 계속 여는 사이에?"
요한은 안경을 고쳐쓰며 난색을 표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겨우 손수건으로 닦았다.
이 방에서 들리는 대화 내용을 녹취하거나, 밀고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에이미는 고집스러웠고 완전한 혁명에 대한
인민해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혁명으로 세워진 이 나라가 반쪽짜리 다리에 위태로이 서 있는
마차와도 같다는 것이였다.
"날개를 잃었어요. 아아... 레인이 날 태우고 언젠가 하늘을 날았던 그 붉은나무 협곡을 다시 한번 날고 싶어요. 그 날개달린 용 위에
다시 오를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혁명에 조차 날개를 달아줄 수 없는 말뿐인 그대의 여왕이란걸... 나는... 여왕이 될 거라고...
예언했지만... 돌 위에 올려진 혁명이 아니라... 진창에 빠져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혁명이란걸... 알았다면... 날개를... 다시 펴지 못하게
될 거란 걸 알았다면... 난... 멍청하게도..."
에이미는 소녀처럼 자신의 녹색 머리칼을 움켜쥔 채 희안하게 웃어대며 끅끅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단지 과거의 후회속에
슬퍼 우는 눈물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푸르게 질려가는 그녀의 얼굴을 본 간호사가 급하게 달려가 그녀의 팔을 걷어올렸다.
"선생님! 그린테일 씨가..!"
얼굴과 팔에서부터 푸르게 퍼져가는 반점. 그리고 그보다 더 파랗게 질려가는 손 끝마디,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독사꽃을 먹고 있었다.
그게 언제인지 아무도 몰랐다. 황급하게 문을 박차고 나간 간호사가 사람들을 부르러 간 사이 요한은 그녀의 팔을 움켜쥐고 어떻게든
독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냥... 둬요... 나는 지금... 레인에게 가고 있어요. 살아서 가지...못할 육체를... 죽어서 영혼만이라도..."
"해독제 가져와! 뭐하나! 젠장! 아드리아!"
"새 국왕에게... 내가 바람처럼 사라졌다고만... 그렇게..."
주치의 요한이 다급하게 간호사들을 불렀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생명을 잃은 뒤였다.
아마 그녀는 지금쯤 레인의 영혼이 떠돌고 있을, 언젠가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은하수의 바다로 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