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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6 13: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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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걸음/
이공범 교수의 위진남북조사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대의 관료 임용은 삼공, 구경, 군 태수, 현령, 장 등 녹봉 2백성 이상의 관위는 황제가 그 임면권을 가졌으며, 1백석 이하의 이른바 두식이나 좌사의 하급관위는 해당관청의 장관이 선임권을 갖고 있었다. 이들 하급관리는 연차나 공적으로 승진하는 것이 아니고 2백석 이상의 관위에 오르려면 원칙으로 선거에 따라 추천되어 낭관을 거쳐서 상급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두식, 좌사, 직과 낭관은 확연히 구별되어 관료 위계 질서가 연속이 아니라 단절되고 있었다.
낭관(郎官) 임용에는 다음 다섯 종류의 방도가 있다.
1. 북변 제군 출신의 양가자 즉 호족, 고위관료의 자제로 무술이 뛰어난 자.
2. 3년 이상 고급관료(공경(公卿)에 상당)재임자는 자제 1명을 낭관으로 임용(전한 말 애제(哀帝) 때 폐지, 임자법(任子法)).
3. 기근 때 곡물 600석 또는 30만전 이상을 헌납한 자.
4. 효렴(孝廉),현량, 방정, 무재, 고재 등으로 추천되어 시험에 합격한 자.
5. 삼공(三公), 대장군(大將軍), 구경(九卿), 태수, 군 도위 등 중앙과 지방의 고급관료에 벽소 되거나 황제에 징소되어 발탁된 자.
이 가운데 4가 이른바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로 한대 관료제의 기본 뼈대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후한 때 부터는 각군에서 효렴으로 추거(推擧)되어 낭관에 임명되는 정식의 길보다도 5의 벽소나 징소가 관료계로 진출하거나 승진하는 데 유리하여 오히려 이 길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따라서 지방에서 세력 있는 자, 재력 있는 자 또는 혈연관계를 통해서 삼공, 구경과 같은 중앙의 유력한 고급관료가 천거하여 관계에 진출해서 그 고리(故吏)가 되었다. 또 후한 때는 유학의 교양이 관료 임명에 필수 조건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학의 대가는 고관에 재임한 자가 많았다. 이런 유학자의 가르침을 받은 자를 문생이라고 한다. 따라서 유력한 관료의 고리, 문생이 되는 것은 또한 관료 진출을 위한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관계에는 파당이 생기고 상호 제휴하면서 또는 대립하며 전제군주의 관료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태가 진전하게 되었다. 후한 말에 일어난 당고(黨錮)는 여기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조의 아래에서 일했던 인사들의 대부분도 위에서 말하는 4와 5의 방법으로 임용되었는데, 이는 당시엔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일부 몇몇 사례에서 능력만 보고 뽑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지방의 세력이나 혈연관계를 업고 임용되었다고 봅니다. 단지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인사들인 만큼 능력이 좋은 인재가 많았던거죠. 이들의 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들이 쉽게 임용된 데에는 환경적인 측면도 큰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예를들면 순욱과 순유를 배출한 순씨 가문도 당대의 유력 가문이었다죠.
(여담이지만 유비가 높게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당대의 유력가문의 양자였던 환경 덕에 일찍이 효렴에 추천된 조조(원술이나 손견, 손책부자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고 당대의 유력가문에 직접 벽소된 원소(사마의도 여기에 속합니다)와는 다르게, 유비는 일개 지방 유학자의 문하생으로 시작한 인물이거든요.)
유비든 조조든 인재의 등용에 있어 가장 주를 차지한것은 기본적으로 한대의 인재등용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능력만을 보고 일천한 출신의 인재를 등용한 예도 있는 경우도 둘 다 있구요. 단순히 조조만 능력위주의 인재선발을 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군요.